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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숲을 거닐며 ◈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장편소설

 

이 소설은 ‘1954년에 조셉 프랭클을 만나는 랄프 로렌이 존재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을 읽은 지 오래되어 자세한 줄거리를 얘기하기보다는 책 뒷표지에 두 명의 추천인이 적은 소감 중 일부를 옮겨 적어 놓으면 기억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그것으로 갈음한다.

 

견고하던 세계에서 미끄러진 한 남자의 특별한 여정을 통해 작가는 희미해져가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들, 사라지지 않는 진실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이현(소설가)

랄프 로렌. 이 난데없고 상투적이며 몰개성적인 이름에서 무모하게 시작된 기억의 활동들은 신기하게도 어느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생동하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그것은 듣는 이과 말하는 이,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한국어와 영어, 내용과 형식, 궁극에는 와 낯선 타인들 사이에서 거듭 미끄러지고 간극을 발견함으로써 질문을 꺼뜨리지 않는 겹겹의 이야기이다. 성취와 효용이 아니라, 실패와 무용함의 힘으로 세계의 잠재성에 응답하는 씁쓸하고도 역동적인 기억들의 서사. 목적지를 잃어야만 활기를 발견하는 세계란 이런 것이다. -남다은(문학평론가)

 

책 속에서... 내만대로 밑줄...

나의 말이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

어디 말뿐이겠어. 글에서 기억이 툭 튀어나오기도 하고, 풀꽃 하나, 풍경 하나, 공기, 바람, 그 모든 것들이 문득문득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다만, 지금 바라는 건 불러일으켜진 기억들이 더이상 아픔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 담담하게 기억될 수 있기를.

모든 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단다. 그냥 사라지는 건 없어.”

진짜 돌아올까. 그럼 정말 좋겠다. 그냥 사라지고 말까봐 살짝 두렵다. 어떤 기억은 그렇게 강렬했던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서조차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 그저 안갯속 같고 꿈결 같은 일들이 많다보니, 진짜 그냥 사라지고 말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밑줄.

이 세상의 누군가는 당신의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을 거에요. 그냥 잘 들으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그냥 당신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돼요.”

어쩌면 모든 걸 다 잃은 것 같은, 중요한 사람에게 제외된 것 같아 허전한 이 순간, 더이상 의미 있는 일들이 없을 것 같아 허랑한 이 순간,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의 두드림이 있을지도, 아니면 잃었다 생각한 존재가 다른 두드림을 보내고 있을지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그 애의 시간이 얼마나 많겠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에게 암흑과 같은 시간을 주게 되는 거겠지. 그건 때로는 선물이야.

너무 많이 알아서 병이 되는 경우도 있더라는 경험 때문인가. 그래서 공감 가던 구절. 이젠 알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저절로 모르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런 암흑이 내게 축복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는 건 아니고, 실은 각자의 영역은 고유하게 존재해야 함을 절절히 깨달은 공감. 그 선을 넘은 것에 대한 대가가 너무 크고 아프기에.

 

 

2021_0326. 쇠날

유스티나 푄Fh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