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바이올렛 화분 하나를 선물 받은 것이. 보라색을 유독 좋아하는 나이기에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데 그분들 중 한 분이 특별히 바이올렛 보라색 꽃을 보고는 날 떠올렸노라며 화분을 선물해 주셨다. 그게 지난 7월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 보라색 꽃을 보며 얼마나 행복했던지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던 중 옆자리 계신 선생님께서 바이올렛은 잎만 잘라 꽂아 두어도 번식이 잘 된다는 말씀을 하셨고, 궁금하면 못 참고,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즉시 움직이는 난 그 순간 마침 비어 있던 작은 화분에 내 바이올렛 화분 뿐만이 아니라 주변 다른 선생님들 화분(서로 조금씩 다른 색깔의 꽃이 피었으므로)에서 한 잎씩 베어내어 꽂아 두었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한 번씩, 이 녀석들 갈증나겠다 싶은 순간에 한 번씩 물을 주었었고, 가끔은 햇살이 필요할 것 같아 창가에 내놓았다가는 퇴근하며 들여놓고 가기도 했고, 자주 눈길 주며 바라본 것. 그게 내가 한 일의 전부이다.
그런데 오늘. 추석 연휴를 보내고 다시 돌아온 일상의 자리에서 익숙하던 일상이 조금 어색해진 듯한 느낌의 하루를 여는 순간, 무심한듯 건너다 본 화분에서 이렇게 이쁜 새싹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요 녀석을 바라보면서 잎이 시들지 않고 있으니 살아 있기는 한가보다 하면서도 두어 달이 돼 가는데도 영 변화가 없어 뿌리가 내리기는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의구심을 한 방에 날려 버리게 만들어 준 것이다. 어찌나 기특하고 고맙던지. 그리고 의구심을 갖고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했던 내 맘이 얼마나 미안하던지. 보고 또 보고. 한참을 들여다 보다가 지금은 다시 물을 흠뻑 주어서 까슬하고 청량한 가을 바람과 말간 햇살 아래 더 싱그러워지라고 창밖에 내 놓았다.
오늘 하나 또 배웠다. 기다림의 덕. 일부러 의식하고 기다린 건 아니지만, 가끔씩 조바심 나기도 했지만, 진득하게 기다린 보람을 마주하며 시간이란 그냥 흐르는 게 아니란 생각을 한다. 진정한 마음을 지니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믿고 기다려 준다면, 진득하게만 기다려 준다면 그 덕을 되돌려 주는 게 어디 이 바이올렛 화분 뿐일까 싶다. 사춘기 들어서면서부터 내내 까칠하긴 했지만, 올해 들어 유독 더 까칠해져 엇나가려고만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많이 아프고 힘들었었다. 그 순간 바로 그 문제에 부딪쳐 볼까 하는 생각도 없었던 게 아니다. 그렇지만, 그때 내가 선택한 것도 기다림이었었다. 긴 시간에 자알 졸이고 다듬고 길들이면 그러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더라도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었다. 물론 그 기다림의 시간 중에 참을성 없이 살짝살짝 부딪기도 했음을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런 순간마다 다시 맘자리 다독이며 진득하게 기다리기를 내 스스로에게 주문하고 또 주문했었다. 그리고 요즈음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듯한 아이를 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의 기쁨이 어떠한지는 직접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게다.
오늘 아침 바이올렛 화분의 신통한 새싹을 보며 어쩌면 내 아이도 저렇게 자라고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흙 속에서 저 혼자 뿌리 내리고 그 뿌리로 자양분 힘껏 빨아들여 싱싱한 새싹 밀어올리듯이 내 아이도 지금 열심히 뿌리 내리고 있는 중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새싹을 위해 기다렸던 시간처럼 여전한 믿음으로 내 아이들의 자람을 진득하게 기다려 주는 것이다. 가끔씩 물도 주고, 더 싱그러워지라고 햇살과 바람 결에 맡겨 두기도 하면서 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추석 지난 날 답지 않게 후텁지근하고 덥더니, 그저께 저녁 바람부터 확 느낌이 달라졌다. 바람이 하도 예뻐서 작은 아이랑 쇼핑 핑계 대고 나간 길에 한참을 손잡고 걷기도 했더랬다. 참 좋은 계절이다. 지금 이 순간 창가에서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도 이쁘고, 열린 창틈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도 이쁘다. 정말정말 이쁜 날이다. 이런 날들이 얼마나 계속될까 하는 안타까움도 살짝 들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즐기련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련다. 잘 다독이련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란 녀석이 또 마술을 부려 내 삶에도 저렇게 이쁘고 멋진 새싹 만들어 주겠지. 기대되는 하루하루다.
2013. 9. 23. 달날
유스티나 푄Fhon
요 녀석이 엄마!
'◈ 바람의 삶 이야기(수필)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상_쓸쓸함 혹은 허무에 대하여 (5) | 2021.06.30 |
---|---|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가 보다, 적어도 난.... (0) | 2021.06.22 |
단상_《신영복의 더불어 숲》 연수를 듣고 (0) | 2021.06.21 |
결론부터 알고 산다면… (0) | 2021.03.18 |
시간에 대한 생각 하나 (0) | 2013.09.11 |